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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J

 

 

Note from Joe Calarco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로미오와 줄리엣>. 첫 번째 숙제는 배경을 어디로 하는가였다. 난 컨셉이 없는 컨셉쇼를 그 무엇보다도 싫어하는지라, 만약 남자들로만 캐스트가 만들어진다면 그들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세계에 거주해야만 했다. <R & J>의 배경을 정하는 일이 곧 이 극이 성공하느냐 성공하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셈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각색이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영감을 받았으리라고 넘겨짚는데, 사실 난 그렇게 비교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감상주의를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제 영감을 준 작품이라면 <The Crucible (시련)>으로, 그 작품에서는 억압이 정신증으로 귀결됨을 보여준다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이 하는 행동들은 따지고 보면 이성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파리대왕>인데, 여기서는 정돈된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원초적인 폭력으로 귀결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두 작품 모두 군중심리를 다루는데 난 그게 <R & J>의 에너지를 형성하는 주효한 팩터라고 본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많은 부분이 성적 히스테리아에 관한 것인데, 나는 그 점을 충분히 포착하고 싶었다. <R & J>의 세계에는 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두 연인, 그 둘의 금지된 첫 키스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을까? 두 남학생의 금지된 첫 키스라면 어떨까. 이 소년들이 있는 곳을 카톨릭 교리가 통제하는,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아니면 단순히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이 금지된 학교라고 설정한다면? 우리 앞엔 억압된 히스테리아가 꿈틀거리는 세계가 만들어진다.

 

이 작품은 남자들에 관한 연극이다. 이 극은 어떻게 남자들이 다른 남자들과 상호작용하는가에 대한 극이고, 그 과정에서 남자들이 여자를, 섹스를, 성을, 폭력을 대하는 방식을 다룬다.

 

이 각색은 엄밀히 말해 동성애에 관한 것이 아니며, 이 대본을 올리는 그 어떤 프로덕션도 동성애에 관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이 연극은 동성애혐오에 관한 것도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접근 방식으로 그것들이 (동성애/동성애혐오) 먼저 떠오를 수 있겠지만, 난 의도적으로 그것들을 피했다. 물론 이 이슈들은 작품 속에 존재한다. 두 남자가 키스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만 보면 동성애적이라고 할 수 있고, 로맨틱한 사랑을 실연(實演)하는 (acting out) 소년들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들 안에 출몰하는 동성애에 대한 공포감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약 누군가가 사춘기도 채 안돼 보이는 남자배우들로 하여금 반나체나 여장을 하고 무대 위를 뛰어다니게 이 작품을 연출한다고 하면, 그 생각만으로 나는 공포의 비명을지를 수밖에 없다. 나의 목적은 단순하다: 이 소년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이것이 이 작품을 성공적으로 올리는 또 다른 열쇠이다. 배우들/캐스트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R & J>를 한다. 따라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실연하는 학생들을 연기한다. 이게 이 작품의 제대로 된 톤을 확립하는 열쇠이다. 그래야지만 아주 젊고 남성적인 에너지가 작품에서 뿜어져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는 나의 배우들에게 가장 강력한 선택은 학생들을 이성애자로 두는 것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래야지만 남성 간의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거부감이 더욱 몸으로 느껴질 것이라고 봤고, 학생들이 결국 경계 없는 사랑의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더욱 감동적으로, 위대하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짜릿한 이유는 씨어터 그 자체의 본질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단 네 명의 배우만 존재한다. 세트도 의상 체인지도 소품도 없다. 단지 작문 공책, 책(대본) 한 권, 그리고 붉은 색의 큰 천만 있을 뿐. 이들 소년들이 “책상” 밑에서 갑자기 칼을 꺼내 드는 건 논리적이지 않아보인다. 이들이 자신들의 극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것만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숨겨 놓은 “성스런 대본”을 감싸고 있는 붉은 천은 그들에게 유용한“소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핵심은 그것이 현실적인 물건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추상적인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배우들이 그 천을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한, 관객들은 그 천의 사용목적이 무엇이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남자만으로 이루어진 캐스트로 여성을 연기 하도록 한 건, 이 프로젝트의 가장 까다로운 측면이었다. 이 젠더 이슈를 다루면서 그 동안 들었던 코멘트 중 가장 보람 있었던 건,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길 남성 혹은 여성일 수밖에 없는 캐스트의 성별을 어느새 잊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배우들을 여자로 보지도 않았고 여자를 연기하는 남자로 보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젠더에 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목표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냐고 나한테 묻는다면 난 그 답을 모른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단지 내가 캐스팅을 잘해서라고 밖에. 다만 내가 배우들한테 반복해서 강조했던 한 가지는 그들이 남자 학생을 연기하는 게 가장 먼저라는 것이다. 그들이 여성을 연기하는데 있어서의 초기의 당황스러움을 극복하고 나면, 그들은 여성 캐릭터를 “스트레이트 (straight)”로 연기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들은 결코 여성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이 연기한 여자들이 얼마나 파워풀한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강한 존재들로서 쓰여졌다. 여성에 관한 우리 20세기의 견해는 여성을 연약하게 연기하도록 이끌었다—그렇게 쓰여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어드바이스다: 그냥 캐릭터를 연기하라. 외형적인, 정서적인 스테레오타입을 염두 하지 말고!

 

이 공연은 하나의 공동체가 벌인 일처럼 느껴져야 한다. 이 학생들의 모임이 하나의 공동체로, 하나의 부족으로 느껴질수록 마지막에 그들이 자신들의 “꿈”이 끝나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가슴은 더더욱 미어질 것이다. 학생들 중, 실연되고 있는 장면 속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지 않는 멤버는, 그 다음 일어날 일을 기다리면서 적극적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지켜봄”은 이 작품의 에너지를 어마어마하게 증폭시켜준다. 즉, 그것은 작품에 절심함을 생성하는데, 마치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 경우에만 생기는 절실함이다. 각 씬의 시작을 말하는 행위도 극의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마치 학생들이 그 다음 플레이할 게임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이상의 노트와 이어지는 텍스트는 내가 연출가로서 이 극을 올리면서 얻은 인상과, 실제 공연에 유효했던 점들을 최대한 공유하고자 적은 것이다. 하지만 각 연출마다 본 작품의 의도된 비전(vision)과 상충되지 않는 한에서, 자유롭게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어 펼치길 바란다.